사람들은 왜 미래를 알고자 하는가? 인생살이에 필연적으로 맞닥뜨리는 것이 주역(周易)의 길흉회린(吉凶悔吝)이다. 얻어서 좋은 것을 길(吉)이라 하고, 잃거나 빼앗긴 것을 흉(凶)이라고 한다. 그리고 후회와 근심을 회린(悔吝)이라고 한다. 해서 산다는 것은 좋은 것보다는 나쁜 일이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그래서인가 누군가는 ‘사람은 삶이 두려워 사회(社會)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宗敎)를 만들었다’라고 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칡넝쿨처럼 얽히고설킨 인연을 맺으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고 기계가 돌아가면서 발생하는 마찰열처럼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흉(凶)은 필연적으로 발생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흉을 만나면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워한다. 그 이유는 고통의 저변에 죽음에 대한 공포, 실패에 대한 두려움, 노력에 대한 허탈감이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누구나 근심 걱정 없는 편안(便安)한 삶을 원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누구나 자신의 삶이 편안하기를 원한다. 역설적으로 원한다는 것은 그만큼 구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즉 편안함을 구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삶에는 인력(人力)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운(運)의 행로에서 드리워지는 길흉을 알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길흉의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네 삶에서 발생하는 길흉의 원인을 칼로 무 자르듯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예를 들면, 올해 코로나 19의 팬데믹으로 사업의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이 상당하다. 그 사람들은 코로나 19가 흉(凶)의 원인이라고 할것이다, 그러나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듯이 코로나 19로 인해 호황을 누린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코로나 19는 길흉의 원인이 아닌 수단에 불과하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짚신장수와 우산장수를 둔 어머니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雨) 자체는 길흉이 없다. 단지 각자의 상황에 따라 길흉이 구별될 뿐이다. 긴 장마에 우산장수는 운이 좋다고 할 것이고 짚신장수는 운이 나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장마가 길 줄 모르는 상황에서 우산을 팔 것인가, 짚신을 팔 것인가에 대한 선택과 결정에 길흉은 이미 예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택과 결정을 주도하는 힘은 무엇인가? 역(易)을 연구하는 필자는 ‘타고난 기질’과 ‘인연에 의한 마음의 당김’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여기서 ‘타고난 기질’은 사주팔자요 ‘인연과 마음의 당김’은 풍수이다. 풍수가 인간의 삶과 운명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가? 누구나 뜻하지 않은 흉이 닥쳤을 때 흉(凶)의 원인을 생각하는 것은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인은 자신이 믿는 신(神)에서 흉(凶)의 원인을 찾을 것이고, 작명하는 사람은 이름 석 자에서, 명리학을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사주팔자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무속인은 조상귀신에서 찾을 것이고 풍수인은 조상이 묻힌 묫자리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다.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조상을 명당에 모시면 천지가 뒤바뀌어 운명이 바뀌고 나아가 삶의 행로가 180도로 바뀐다고 떠드는 일부 풍수인들의 행태 때문이다.그렇다면 풍수가 인간의 삶과 운명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가를 생각해보자. 풍수의 명당 발복은 환경이다. 즉, 머리가 아둔한 학생에게 명당 발복이 있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우등생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등생이 되기 위해서는 타고난 유전자가 선행되어야 하고 다음으로 자신의 마음가짐과 가정환경이다. 그런데도 일부 풍수선생이라는 사람들은 명당에 조상을 모시면 저절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이것이 바로 혹세무민이다. 풍수는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풍수는 태어날 자손에게는 사주팔자에 영향을 미치고 이미 태어난 자손에게는 사주팔자를 보좌한다고 생각한다. 즉, 길(吉)은 더 크고 길게, 흉(凶)은 짧고 작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풍수는 음택과 더불어 뇌파에 영향을 미치는 양택 또한 매우 중요하다. 각설하고 조상을 명당에 모시면 좋은 일만 있고 궂은일은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또 좋든 나쁘든 집안에 무슨 일만 있으면 묫자리와 결부시키는 것 또한 풍수인이라면 지양할 대목이다. 그리고 조상을 명당에 모시면 한 나라의 대통령이 저절로 된다는 식의 풍수 논리는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대통령이 당선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길(吉)하다고 볼 수 있는가를….사람에게는 태어나면 평생 채워야 할 그릇이 있다. 그것이 사주팔자인데, 예를 들면 종지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 사발을 가지고 나온 사람이 있다. 조상을 명당에 모셨다고 사주팔자가 바뀌어 큰 그릇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은 명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주팔자는 무엇이고 풍수의 역할은 무엇인가?사주팔자는 길흉의 때를 아는 것이고 풍수는 길흉의 알파 플러스(alpha plus)이다.마지막으로 책 한 권을 소개하면 ‘운명의 과학(김성훈 옮김)’이라는 책이 있다. 한나 크리츨로우라는 뇌과학자가 저술했는데 내용 중에 식습관은 유전자가 70%, 환경이 30%가 결정한다는 대목이 있다.운기칠삼(運七技三), 7:3의 법칙이 여기에서도 적용된다.한 사람의 인생에서 사주팔자가 7할을 좌우하고 나머지 3할은 환경적 요소인 풍수가 작용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좋은 것은 구하고 나쁜 것은 피한다는 추길피흉(追吉避凶)은 역학(易學)의 목적이며 존재 이유이다.
11-13
2021년 10월 23일 이른 새벽 고속도로를 달렸다.가을 하늘은 청명했다. 날씨가 가장 큰 부조라는 옛말이 있듯이 산역을 하는데 날씨는 맑고 따뜻했다. 암반 자체의 형태를 띠지만 가볍게 비비면 고운 분말이 된다.암반이 완벽하게 박환되었다. 오늘은 박신명 작가가 집필한 풍수소설 ‘점혈’의 실제 주인공인 나복만의 선친을 이장하는 날이다. 긴 세월, 명당자리를 찾아 자신의 선친을 모시려고 했던 복만의 수고와 노력에 마침표를 찍는 날이었다. 소설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나복만은 지관의 말에 속아 선친을 진흙 구덩이와 차가운 암반에 모셨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누구보다도 마음 아팠던 주인공은 일여(一如)를 만나 지난(至難)한 풍수공부와 기수련을 하였다. 그러던 그가 비로소 혈(穴)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카메라의 오작동인가? 아니면 빛의 향연인가? 상서로운 서광(瑞光)이 비추는듯 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선친을 석중혈에 모셨다. 묘좌유향(卯坐酉向)에 인기(人氣)는 우선이다.오늘 많은 사람이 즐거운 마음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땀을 흘렸다. 또한 복만의 노고에 위로하고 축하해주었다. 함께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피붙이보다 더 깊은 인연을 복만은 엮어가고 있었다.비로소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복만을 바라보노라니 그는 한 세상 헛살지는 않은 듯 싶다. 아니 성공한 삶이고 행복해 보였다. 이날 함께해준 모든 분께 감사할 뿐이다.
10-25 2
2021년 6월 19일 1박 2일 코스로 필자는 거당 선생, 양우당 선생과 함께 무안 승달산에 있는 대지를 찾기 위해 떠났다.가는 길목에 장성에 들려 울산 김씨의 발복지라고 전해지는 민씨 할머니 묘소를 둘러보았다. 민씨할머니에 대해서는 명정재 앞에 세워진 안내문을 참고하면 될 것 같아 사진으로 남겼다. 민씨 할머니는 1421년 세종 3년에 졸했다. 민씨할머니 묘소에 올라서자 국세가 당차게 형성되어 있어 누가 보아도 명당이라고 할만한 자리였다. 그리고 점혈 또한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격의 기운은 부드러워야 하는데 강하게 작용하고 있어서 아쉬움을 남았다.
06-21
금번 필자가 ‘정재삼의 사주잡설’을 출간하게 된 여러 동기 중에 세수(歲首)에 관한 것이 있다. 한 해의 처음 또는 기점을 의미하는 세수(歲首)는 한해가 시작되는 설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 장에서 논하려고 하는 것은 역(易)의 시간으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음력, 양력 설이 아니다. 다시 설명하면 양력 1월 1일은 태양력(太陽曆)의 설이고 음력 1월 1일은 태음력(太陰曆)의 설이다. 그렇지만 사주팔자나 풍수지리에서 적용하는 설, 즉 역학(易學)에서는 한해가 시작되는 기점을 태양력의 2월 4일 경인 입춘(立春)을 세수로 삼고 있으며 그것을 입춘세수설(立春歲首設)이라고 한다. 필자가 처음 역학을 입문했을 때, 출생일을 입춘(立春) 전과 후로 나누는 것을 보고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입춘 전에 태어났으면 소띠요 후에 태어났으면 범띠라는 것이다. 이러한 역(易)의 세수(歲首)는 고서를 보아도 아주 오래전부터 통용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현재도 그것을 바탕으로 사주(四柱) 네 기둥을 뽑고 추명을 한다. 그러나 필자의 뇌리에는 오랫동안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12시진의 시작은 자시(子時)를 하루의 시작으로 하는데 어찌하여 1년의 시작을 인월(寅月)로 하느냐는 것이다. 1년의 시작을 인월(寅月)로 했다면 하루의 기점 또한 인시(寅時)가 타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춘세수에 의해 년(年)의 시작을 2월 4월경의 입춘(立春)으로 적용하고 하루의 시간은 일양(一陽)이 시생(始生)하는 영시(零時)를 적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옛날부터 적용해왔던 관습이니 그저 그냥 적용하면 될 것을 새삼 골치 아프게 세수를 논 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해 신수(身數)를 감명하다 보면 자월(子月)과 축월(丑月)에 발생된 일에 대하여 명쾌하게 말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해서 필자는 오랜 시간 궁구한 결과 입춘세수를 적용하는 이유는 새 생명을 얻은 새싹의 생장소멸이 시작되는 환경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즉 새싹이 올라오는 자연 현상에 따라 봄이 시작되는 입춘을 한해의 기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새싹이 두터운 땅을 뚫고 올라와야만 새싹은 자라고 꽃을 피운다. 그것이 생장이다. 생장이 절정에 이르면 그동안의 화려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열매를 맺고 낙엽을 떨구며 소멸을 한다. 이렇듯 생장소멸의 기점은 생(生)에 있기 때문에 만물이 소생하는 입춘을 세수의 기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부연하자면 필자는 해월(亥月) 생(生)이다. 그러나 생장소멸의 관점에서 보면 필자에게 해월(亥月)은 곧 생(生)의 기점인 동시에 입춘(立春)이다. 이것이 환경의 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의 사주 또한 입춘을 세수삼아 명식이 세워지고, 그 사주팔자는 생장소멸하는 필자만의 시간이며 지도(地道)의 시간이다.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필자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도도히 흐르는 절대의 시간이 있다는 사실이다. 아니 필자가 멸(滅)하고 나서도 영원 속으로 흐르는 우주의 시간이 존재한다. 일양(一陽)이 생멸(生滅)을 거듭하면서 무심히 흐르는 시간이 있는데 그것이 필자가 주장하는 천도(天道)의 시간이다.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자. 역학에는 엄연히 역(易)의 시간이 존재하며 역(易)의 기점은 갑자년(甲子年) 갑자월(甲子月) 갑자일(甲子日) 갑자시(甲子時)라고 하는 사갑자(四甲子)에서 출발을 하였다. 그러므로 시간이 흘러 언젠가는 사갑자(四甲子)가 도래하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즉 우주에는 시간적 개념의 주기(週期)가 존재하며 주기의 어느 지점에서 나의 생장소멸은 시작되었고 나만의 시간을 채운 뒤에는 고단했던 삶을 마치게 된다. 이렇듯 역(易)에는 지도의 시간과 천도의 시간이라는 두 개의 시간이 존재한다.그렇다면 사갑자(四甲子)가 도래하는 시점을 찾으면 주기(週期)가 존재한다는 것과 주기(週期)의 기간까지 알 수 있는데 먼저 입춘(立春)을 기점으로 시작한 인월(寅月)에는 사갑자(四甲子)가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사갑자(四甲子)는 자월(子月)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일양(一陽)이 시생(始生)하는 동지(冬至)이다. 그렇다고 동지(冬至)를 세수(歲首)로 삼을 수는 없다. 이유인즉 월(月)의 시작은 24절기 중 매월 상순에 들어오는 절기(節氣)여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동지(冬至)는 월(月)의 중심점으로 중기(中氣)라고 하는데 중기(中氣) 전후 15일이 월(月)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일양(一陽)이 시생(始生)하는 동지(冬至)를 기준으로 15일 전인 대설(大雪) 절입(節入)이 세수(歲首)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주장하는 대설세수론(大雪歲首論)이다.예를 들어 1923년 12월 17일 00시는 계해년(癸亥年) 갑자월(甲子月) 갑자일(甲子日) 갑자시(甲子時)이다. 이때 년주(年柱)는 입춘세수에 의해 아직 입춘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계해년(癸亥年)이며 대설(大雪)을 세수로 삼으면 갑자년(甲子年) 갑자월(甲子月) 갑자일(甲子日) 갑자시(甲子時)가 되어 사갑자(四甲子)가 이루어지고 나아가 240년의 대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240년의 대주기에는 각각 60년의 춘하추동과 20년의 소주기가 있다.그렇다면 사주명식도 달라지는가?그렇지 않다. 사주팔자는 생장소멸하는 지도(地道)의 시간 즉 대지(大地)의 환경으로 사주팔자가 생성되었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단지 한해의 시작점(유년, 태세)이 입춘(立春)이 아닌 대설(大雪)이라는 것이다. 대설세수론을 적용하면 무엇을 알 수 있는가?먼저 자월(子月)과 축월(丑月)의 감정을 확실하게 논할 수 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반복되는 주기를 통해 한반도에서 매년 발생하는 사건사고를 예측할 수 있다.맺은말...... 사주잡설의 집필 동기를 쓰다보니 내용이 길어졌을뿐만 아니라 쉽게 이해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앞으로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사주잡설에 대한 보충설명을 통해 필자의 생각을 전해볼 생각이다.
03-11
토션힐링의 정점은 삼라만상을 형성하고 있는 개체에서 전해지는 내면의 울림을 전해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인간과 동물 그리고 소리 없이 자리를 지키는 식물들이 전하고자하는 내면의 소리와 소통하여야만 진정한 토션필드를 말할수 있고 나아가 치유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다.오로지 기의 운용만을 설파하고 적용한다면 그것은 분명한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소리의 주파수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시거리 너머에 내가 알지 못하는 현실이 존재하듯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청주파수 20~20000Hz 범위 외에 수없이 많은 소리의 주파수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내 눈으로 보는 시계(視界)가 세상의 끝이 아니듯 육신의 귀(耳)로 듣는 가청주파수의 범위가 세상의 모든 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귀(耳)는 캄캄하고 습한 동굴에서 살아가는 박쥐의 가청주파수를 뛰어넘지 못하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인간의 감각기관이라고 하는 것을 대자연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저 초라하기 그지없다고 할 수 있다. 도가도비상도 (道可道非常道),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라는 도덕경의 구절이다. 이는 이치화 시키고 과학적 분석을 시도하는 자체는 도(道)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면의 울림은 그 어떤 이론이나 과학적 접근이 허용하지 않는 진정한 도(道)의 세계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내면의 울림은 의식 너머에 존재하는 진정한 자아의 세계인 것이다. 필자는 이제 남은 삶을 통해 내면의 울림을 찾아 떠나볼 작정이다. 누가 장미가 아름답다고 했는가? 누가 이름없는 잡초는 밟아도 된다고 했단 말인가? 장미의 비명은 들리고 이름 없는 잡초의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는단 말인가? 반복적 학습과 인간 본래의 감각기관으로부터 정보를 얻고 판단하는 의식이란 참으로 부족하기 짝이 없다하겠다. 따라서 내면의 울림 속에는 토션필드가 있고 완성된 토션힐링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토션힐링은 과학이 아니다. 토션힐링은 필요충분의 조건 속에서 결과의 동일한 반복을 나타내는 과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양물리학자의 유물론적 사상으로 접근한 토션필드는 분명한 한계가 있을뿐더러 종교와 철학적 접근 또한 내면의 소리에 대하여 흔쾌히 답을 내놓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실험을 통한 과학적 데이터도 좋고 종교와 철학의 궁구에서 내놓은 이론 또한 좋다.그러나 내면의 소리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수식어도 필요치 않다는 결론이다. 그것의 답은 도(道)가 전하고자하는 무위(無爲)의 출발일 뿐이다. 한마디로 인위(人爲)의 메시지가 아닌 내면의 소리를 통해 피아간에 하나가 되는 길. 그길이 바로 자아를 찾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호흡을 고르고 가다듬어 육신의 귀(耳)가 아닌 마음의 귀(耳)로 피아의 소리를 듣는 자체가 바로 토션힐링의 시작과 끝이 되는 것이다. 토션힐링에 있어서 누군가를 위해 측은지심으로 기를 운용하는 테크닉 또한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앞에 온전히 힐러를 믿고 몸을 맡긴 그와 내면의 울림이 공명을 이룰때 비로소 완전한 치유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12-19
셰익스피어는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였다. 인생은 내가 어떻게 살고 싶다고 해서 살 수 있는 삶이 아니라고 셰익스피어는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인가? 필자 또한 ‘그 어떤 힘’에 이끌려 자의반 타의반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고 생각을 해본다.여기서의 ‘그 어떤 힘’은 젊은 시절에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며, 그것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젊은이를 향해 깨닫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젊은 날에는 열정과 패기 그리고 젊음이라는 싱그러운 에너지가 있기에 ‘그 어떤 힘’을 피부로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 젊은 사람이 그것을 궁구하고 있다면 주변에서 애늙은이 소리를 들을 것이다.그러나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나면 성공이라는 것이 열정과 패기 그리고 노력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때가 돼서야 비로소 셰익스피어가 이야기했던 삶의 각본, 필자가 이야기하는 사주팔자와 풍수지리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 다반사다. 젊은 날의 꿈은 갈기갈기 찢겨지고, 두 눈의 눈물마저 말라버려야만 ‘그 어떤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니 그만큼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여야 터득할 수 있는 경지라고 하겠다.천둥벌거숭이마냥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지개를 쫒다가 몸과 마음에 피로감이 젖어들게 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삶의 진정한 가치를 생각하게 된다. 진정한 성공이 재물도 명예도 결코 아니라는 것을........채워지면 비워지게 되고, 올라가면 내려오는 것이 자연의 순리요 철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워진 잔이 비워지고 날개 없이 추락하고 나서야, 사는 모든 것이 헛된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간은 한평생 부질없는 꿈만 꾸다가 죽을 때가 돼서야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 산다는 것은 참으로 덧없다는 생각이 든다.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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