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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영릉을 명당이라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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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재삼의 팔괘풍수 작성일21-02-22 11:47 조회1,5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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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21일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모셔진 여주 영릉에 다녀왔다.

세종대왕이 살아생전 자신의 부친인 태종 근처에 묻히고 싶어 해서 내곡동에 수릉(신후지지)을 마련하였다. 먼저 간 소헌황후를 그곳에 장사지내고 1450년 세종대왕 또한 그곳에 잠이 들었다. 당시에 그 자리를 두고 풍수가인 최양선은 ‘손이 끊어지고 맏아들을 잃는다.’ 고 하였다. 훗날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으로 세종의 장남인 문종이 즉위한 지 2년 만에 죽고 그의 아들 단종 또한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세조 또한 의경세자(20세)를 잃고 또 예종의 장남인 인성대군 또한 세 살되던 해에 죽었다. 그렇다보니 맏아들이 죽는다고 했던 최양선의 말이 회자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예종 1년(1469) 20년만에 영릉을 여주로 이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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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개인적으로 역대 임금 중에 세종대왕을 최고의 성군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유인즉 지금 이 순간도 한글이라는 문자를 통해 세종대왕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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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이른 봄 날씨로 많은 관람객이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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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세종대왕릉을 찾은 이유는 역사탐방이 아니라 과연 그 자리가 명당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혹자는 세종대왕을 이 자리에 모셨기 때문에 조선 왕조가 100년 연장되어 500년을 갈 수 있었다고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다. 이름하여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다. 성군이었기 때문에 세종대왕은 명당에 모셔졌으면 하는 마음은 모두의 바램일 것이다. 필자의 마음 또한 이와 같다. 그렇지만 풍수인으로서 길지인가 아니면 흉지인가에 대하여 명확하게 해둘 필요가 있다.

 

세종대왕이 모셔진 영릉이 과연 명당인가?
필자가 둘러보고 내린 결론은 흉지이다. 혈(穴)이란 생기맥이 흐르는 내룡에서 형성되는데 현재 모셔진 자리는 애당초 생기맥이 흐르지 않는 능선에 불과하다. 즉 내백호에 해당할 뿐이다. 그리고 전체 국세를 보더라도 대지(大地)라고 할 수가 없는 곳이다. 비록 조정 대신들이 머리를 싸매고 선정한 자리이기 때문에, 아니면 야사에 그럴듯하게 포장되었기 때문에 풍수인들이 명당이라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 자리는 단연코 흉지이다.

 

그런데 영릉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조선 왕실에서 점혈(點穴)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이다. 그것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은 단종 즉위년 7월 24일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제목 : 세조와 안평대군·황보인 등에게 명하여 건원릉에 가서 동혈을 살펴보고 정하게 하다

내용 : 영릉의 서혈(西穴)을 파니 돌이 있어서, 세조와 이용(李瑢)·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정분(鄭苯)·이정녕(李正寧)·정인지(鄭麟趾)·이사철(李思哲)·민신(閔伸)·이사순(李師純)·이순지(李純之) 및 풍수학 낭관(風水學郞官)에게 명하여 건원릉(健元陵)에 가서 동혈(東穴)을 살펴보고 정하게 하였다. 처음에 영릉 남혈(南穴)에 물이 있으므로 정인지가 다시 다른 혈(穴)을 상지(相地)하려 하지 않고, 위의 천광(穿壙)에 가깝게 하려 하니 여러 대신들이 따르지 아니하고서 다시 서혈(西穴)을 상지(相地)하였다. 정인지가 기꺼이 행하려 하지 않으니, 세조가 강제한 다음에 이를 상지하여 광(壙)을 팠는데, 또 돌이 있었다. 정인지가 말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그렇게 한 것이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개석(蓋石)을 뜨는데 무지개가 곧 나타나서 건원릉에 닿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이 글은 문종의 능을 결정하는 내용이다. 문종은 원래 살아생전에 아버지가 모셔져 있는 대모산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래서 영릉의 남쪽에 자리를 정하고 파보니 물이 솟았다. 이때 정인지가 그 근처에 다시 파라고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함께 간 대신들이 정인지의 말에 태클을 걸고 서쪽혈을 추천하였다. 그것을 본 수양대군이 대신들의 추천에 따라 서쪽혈을 파라고 지시하였다 그렇다 보니 정인지가 어쩌지 못하고 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작 서쪽을 다시 정해 파보니 그곳에서는 돌이 나왔다. 돌을 걷어내니 하늘에 무지개가 뜨고 태조가 모셔져 있는 건원릉과 닿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본 정인지가 하늘의 뜻이라고 했고 결국 문종은 대모산에 잠들지 못하고 건원릉이 있는 동구릉에 잠들 수밖에 없었다. 필자가 이글을 보면서 조선의 풍수에서 점혈은 주먹구구식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기(氣)를 논했을 조선 왕실에서 점혈에 대하여 무지했다는 것은 실록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내곡동 영릉에서 구리 건원릉까지의 직선거리는 대략 18km이다. 그런데도 무지개가 영릉과 동구릉을 연결한 것을 식별했다고 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구라가 아니다. 또 무지개가 연결해 준 것이 하늘의 뜻으로 인식하여 문종이 영면할 자리를 정했다는 것을 보면 조선 왕실의 풍수 실력에 대하여 씁쓸한 마음까지 든다. 특히 정인지는 누구인가 당시의 대학자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물이 솟으니 팠던 곳과 가까운 곳을 다시 파라고 했다는 것은 점혈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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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국세에서 능을 조성할 수 있는 곳은 홍살문을 통과하기 전, 우측 능선 뿐이다. 이 국세에서 주혈이며 현재 조성된 영릉은 내백호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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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퍼짐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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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의 안산이다.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이 국세는 대지(大地)라고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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