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의 애환과 곡절의 원인은 움직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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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재삼의 팔괘풍수 작성일17-12-19 12:46 조회2,59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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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에서 역학(易學)은 출발한다. 그러한 변화를 감지하고 길흉을 판단하기 위하여 변화를 일으키는 주된 요인을 시간에서 찾는 것이 대표적으로 사주팔자로 알고 있는 명리학이요, 풍수지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변화의 주체를 시간이라고 했다. 그 시간의 작용력 또는 흐름에 따라 변화가 발생되는 사물 또는 장소 등 수많은 상의에 대하여 공간이라는 표현을 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저 공간이라고 하니까 허공 또는 우주공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변화되는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표현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어떤 능력이 있어 변화를 주도하고 인간사에 길흉으로 작용하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변화를 주도하는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없다면 길흉이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러한 길흉이 인간의 생로병사와 삶의 고비에서 어김없이 작용하고 있다.길과 흉의 마디마디 작용하는 시간이라는 것이 인간사에 사사건건 개입하고 있으며 또한 스스로 존재하는 이유를 필자는 삼라만상의 동(動)함에서 기인한다고 판단한다.
우주의 변함 그리고 움직임으로 대표되는 현대물리학의 우주팽창론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삼라만상의 생로병사를 비롯한 인간사의 애환과 곡절의 원인은 움직임에 있는 것이다.태초에 시간의 개념까지도 논할 수 없는 정(靜)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태극 즉, 동(動)의 세계로 변하면서 시간은 길흉의 주체가 된다.태양이 동(動)하고 달이 동(動)하고 지구를 동(動)하게 하는 동(動)의 에너지에 갇혀 우리네는 살아가야 한다.
그러한 우리네 삶은 우주의 동적 기운에 의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강요당하고 있다. 따라서 분주히 움직이는 태양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만상에는 움직임(動)이란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에서 인간에게 희로애락이 생기고,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기를 바라는 애환과 곡절이 발생된다. 큰 움직임에는 크게 느끼는 희로애락의 결과를 낳고, 작은 움직임에는 소소한 희로애락만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일정한 주기의 움직임이 발생되는데 인간사에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발생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동(動)함에 있어 완벽하게 일정한 패턴이 정해져 있다면 큰 틀의 변화는 허락될지 몰라도 인간에게 예측되지 않는 변화는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정해진 규칙성이 존재한다면 어제의 그 일이 오늘 또한 반복되기 때문에 살아가는데 단조로움은 있을지 몰라도 길흉이라고 말하는 삶의 희비는 결코 나타나지는 않는다. 이러한 변화에는 일정한 규칙성이 있는 광의적 시간의 개념과 규칙성과 불규칙성으로 이루어진 협의적 시간의 개념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광의적 시간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자전과 공전이 정확한 주기로 운행되기 때문에 광의적 시간의 변화는 일정한 패턴으로 변화하고, 따라서 변화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에 길흉화복 또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희로애락 또는 길흉이 규칙성과 불규칙성이 함께 공존하는 모순적인 협의적 시간의 개념에서 발생되는 이유로서 기후를 들 수 있다.
필자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자전축이 23.5도가량 기울다보니 계절의 변화가 발생되고 인간은 계절에 따른 기후 변화에 의해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변화되며 아니 기후는 우리인간에게 다양한 변화를 강요하고 있다. 따라서 예측 가능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인간사에 내재될 수밖에 없는 구조는 규칙성의 시간과 불규칙성의 시간이 모순되게 공존하기 때문인 것이다.
흔히 말하는 시공간이라는 개념은 공간(空間)이란 규칙성의 시간이요, 시간(時間)이라는 것은 규칙성의 시간과 불규칙성의 모순의 시간인 것이다. 따라서 규칙과 불규칙의 시간이 만들어내는 인간의 길흉화복의 근원은 움직임에 있는 것이다. 그 움직임에는 23.5도 누워서 자전과 공전을 하는 지구자체에 있는 것이고 지구에서 삶을 영위하는 우리네 인간은 그 움직임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으며 길흉화복과는 숙명적 관계라고 할 것이다.
해서 길흉으로 부터 전혀 영향을 받고 싶지 않다면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될 것이고, 늙지 않고 젊게 살고 싶다면 이 또한 몸과 마음이 정적(靜的)으로 살면 되리라 생각된다. 이는 움직임이 적으면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고, 길흉의 간극 또한 작아지게 되기 때문이다. 욕심은 동(動)을 만들고 동(動)은 결과에 대한 욕심을 만든다.
누구에게나 태어나면서 생로병사와 길흉의 시간은 정해져 있다. 그것을 정적으로나 동적으로 운용하는 것은 본인의 생각 또는 욕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변화를 주도하고 그 변화의 시간표대로 살아가는 것이 자연 앞에서 순응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필자의 생각은 진정으로 대자연 앞에서의 순응이라 함은 규칙과 불규칙의 시간이 만들어내는 시공간에서 때를 따라 정동(靜動)을 운용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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